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83년 한국시리즈 (문단 편집) == 기타 == * 보너스 문제로 갈등을 빚은 MBC 청룡은 보너스 문제의 중심에 있던 김동엽 감독을 해임하는 것으로 문제를 정리했지만, 그 뒤로 MBC 청룡은 선수단과 프런트, 감독의 3자 갈등이 고질병이 되면서 [[LG그룹]]에 [[LG 트윈스|인수되기 전까지]] PO 진출에 번번이 실패[* 실제로 MBC 사장과 고위간부들 사이에선 방송국이 오케스트라 같은 악단이나 운영하지 야구가 왠 말이냐며 운영자체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낸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한다. * 투수진에서 다소 열세였지만 무리에 가까운 운용으로 우승을 따낸 해태는 예상대로 우승 후유증으로 이후 2년 동안 정상과는 거리가 먼 성적을 내었다. 물론 그 뒤로는 프로야구의 신화가 되었지만. * 우승 보너스로 1억원의 거금을 풀었지만, 해태의 대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듬해인 1984년 시즌, 해태가 선수들의 짭짤한 용돈벌이 수단이었던 메리트 시스템을 폐지하고 원정경기 숙소를 이전보다 낮은 등급의 호텔로 바꾸는 등 오히려 선수들 대접이 더욱 열악해진 것이다. 결국 불만을 품은 해태의 선수들이 주동해서 벌인 것이 그 유명한 '''[[해태 타이거즈 불고기 항명사건]]''' 이다. 1984년 시즌 개막 후 처음으로 맞이한 서울 원정경기가 끝난 후 타이거즈 구단주였던 박건배 해태그룹 회장이 저녁 회식을 베풀었는데 선수단 전체가 불고기에 손을 대지 않고 태워버리는 집단 항명을 벌인 것이다. 결국 심기가 불편해진 박건배 회장은 회식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고 김응용 감독은 노발대발했다. 당시 어느 한 선수가 꼭 주동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정작 어느 누구도 "내가 주도했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으면서 프로야구 판의 이단아 격이었던 [[김일권]]이 주동자로 찍히게 된다. 물론 실력이 있으면 악감정은 눈감는 김응용 감독은 이순철의 등장 전까지는 김일권을 주전으로 쓰기는 했다. [[김일권]]은 [[야사시TV]]와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하여 이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으며 여러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모든 해설가와 야구 전문가들이 MBC 청룡의 우세를 점쳤지만, 딱 한 사람만이 해태의 우승을 예고하면서 이 해설가는 그 뒤로 해설계의 대표주자로 떠오른다. 바로 [[환일고등학교]] 체육교사를 그만 두고 당시 [[한국방송공사|KBS]]에서 본격적으로 프로야구 해설을 시작한 [[하일성]]이었다.[* 이후에 방송에서 해태의 우승을 예상한 이유를 '내가 그때 뭘 알았겠어, (평소에 친한 김)응용이 형님이 감독으로 있어서 그냥 그렇게 말한거지'라고 하였다] * [[2017년 한국시리즈]] 전까지 [[선동열]]과 [[이종범]]이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모두 없는 상황]]에서 타이거즈가 우승을 차지한 유일한 시리즈였다. --그런데 둘 다 있을 때 우승했던 건 [[1993년 한국시리즈]] 1번 뿐이다.-- * [[김성한]]이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술회하기를 여러 차례 우승을 했지만 해태 최초의 우승이어서 유독 눈물을 많이 흘렸던 기억이 난다고 한다. * [[해태 타이거즈]](현 [[KIA 타이거즈]])는 이 시리즈에서의 우승으로 '첫 한국시리즈 진출'을 기준으로 첫 4경기에서 전승 우승을 기록한 사실상(중간에 무승부 하나가 낀 관계로) 유일한 사례인 듯 했다. 그로부터 38년 후인 [[2021년 한국시리즈]]에서야 [[kt wiz]]가 비로소 한국시리즈 첫 진출에서 4전 전승 우승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